6강
지금까지 우리는 덕 중심 윤리학과 행위 중심 윤리학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살펴보았다. 어느 접근법이 옳은가? 둘 중 하나가 옳은가? 두 가지 접근법은 서로 화해할 수 있을까? 덕과 도덕 규칙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세 가지 기본적 관계가 있다. 그것들 모두가 오늘날 다양한 철학자들에 의해 지지받고 있는 입장들이다. 이 절과 다음 절에서 우리는 이러한 입장들을 검토할 것이다. 세 가지 관계를 간단히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순수한 덕 중심 윤리학은 덕에 가장 비중 있는 도덕적 무게를 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덕 규칙들은 덕으로부터 추출된 것, 덕의 반영 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법은 심각한 도전을 맞이한다. 순수한 덕 중심 윤리학이 도덕적 행위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때때로 정확하게 기술한다. 즉, 우리는 가끔 좋은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행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모든 윤리적 행위를 설명하기는 어려운 듯하다. 때때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하여 규칙과 도덕적 추리를 사용한다.
문제는 이러한 규칙이 도덕이 지시하는 그것과 정말로 무관한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순수한 덕 중심 윤리학에 대한 완벽한 설명을 제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그러한 설명이 가능한지 여부도 알기 어렵다.
순수한 덕 중심 윤리학은 인식론적 문제와 실천적 문제, 두 가지 주요 문제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것 같다.
인식론적 문제는 참된 덕을 구성하는 습관과 감정들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누가 덕 있는 사람인가? 당신이 내게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나는 "덕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을 행하라"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당신은 "누가 덕 있는 사람인가? 라고 맞받아친다. 이것에 대해 나는 "옳은 것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이러한 추리는 순환적이다. 원리가 없다면 덕은 방향을 상실하고 만다. 우리는 덕의 기준 역할을 하는 무엇이 필요하다.
이러한 인식론적 문제와 관련된 것이 덕 상대주의의 문제이다. 덕으로 간주하는 것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부심에 특별한 덕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했지만, 기독교는 그것을 최고의 악으로 여긴다. 창 하나만 달랑 들고 한 무리의 거대한 동물과 맞닥뜨린 고대의 동굴 거주인 한 사람이 그의 동료 종족을 버리고 도망간다면, 그는 그 공동체에 의해 "지나친" 두려움을 가진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반면 오늘날의 사회는 그런 판단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자는 재물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덕으로 보지만, 마르크스주의자는 그것을 악으로 여긴다.
순수한 덕 중심 윤리학이 가지고 있는 실천적 문제는 그것이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할 방법에 대하여 어떤 지침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교에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언급이 매우 적다. 우리는 윤리학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행위 지침을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은 "선한 사람이 하고자 하는 것을 행하라"긴 것 같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즉, "누가 선한 사람인가, 우리는 어떻게 그 혹은 그녀를 알아볼 것인가?" 더 나아가, 설령 우리가 그 질문에 대하여 덕과 무관한 윤리학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일종의 행위들이나 원리들을 참조하지 않고서 대답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상적인 인간들이 우리의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가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때때로 옳은 행위는 두 가지 극단 사이의 중간적인 평균, 즉 중용인 것처럼 썼다. 예를 들어, 용기는 무모함과 비겁함이라는 악덕 사이의 중간 지점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몹시 어려운 것이다. 매기의 지적대로,
무엇이 선한 삶인가, 간단히 말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혹은 어떤 기준에 의해 우리는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을 결정하려고 시도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지침으로서, 이것은 정확한 도움을 주기에는 너무 순환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이 도덕적 덕뿐만 아니라 많은 지적인 덕에 대한 상세한 기술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비결정성의 분위기는 계속 남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에서) 우리는 각각의 덕에 대조되는 반대의 덕, 즉 한 쌍을 이루는 악덕의 이름을 배운다.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우리가 구분선을 그려야 하는가, 어디서 어떻게 우리는 중용의 지점을 찍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배우는 바가 거의 없다. 시즈위크가 말하듯이, 그는 단지 덕이 어디쯤인가를 가르쳐 주기만 한다."
간단히 말해, 덕 윤리학은 적용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대부분 이 지침이 있어야 하는 개별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지 않는다.
표준적 행위 중심의 견해는 도덕적 덕들을 인정하지만 그들에게 부차적인 지위를 부여한다. 이러한 견해는 세 가지 논제를 주장한다."
1. 규칙의 행위 본성 논제(action-nature of the rules thesis). 도덕 규칙은 사람들에게 어떤 행위를 행하거나 아니면 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은 다양한 덕을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것을 결여한 사람들에 의해서도 행해질 수 있다(예를 들어, 선의를 가진 사람과 선의가 없는 사람 모두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과 같은 선의의 행위를 행할 수 있다).
2. 환원주의적 논제(reductionist thesis). 도덕적 덕은 도덕 규칙들에 복종하는 성향, 즉 어떤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는 성향(예를 들어, 선의의 덕 은 선의의 행위를 행하라는 의무를 수행하는 성향)이다. 덕의 상응 이론에 따르면, 각각의 덕은 적절한 도덕원리에 상응한다.
3. 도구적 가치 논제(instrumental value thesis). 도덕적 덕은 본디 가치가 아니라 도구적이고 파생적인 가치를 가진다. 덕을 가진 행위자는 옳은 행위를 할 가능성이 더 크다(즉, 규칙에 복종할 가능성이 더 크다). 덕이 중요한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옳은 행위를 하도록 동기부여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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