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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가치에 대한 의문, 소크라테스와 사르트르

by 형티처 2023. 1. 11.

어떤 것들이 좋은 것 혹은 가치 있는 것인가? 라는 물음은 애매하다.


우리는 먼저 가치 혹은 좋은 것의 종류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위의 인용에서, 소크라테스는 세 가지 종류의 좋은 것을 구별한다. (1) 순수하게 본래적으로 좋은 것 (단순한 즐거움들이 그 한 예이다), (2) 순수하게 도구적으로 좋은 것(의료나 돈벌이가 그 에이다), (3) 그 둘이 결합한 좋은 것(지식, 시각 그리고 건강과 같은 것들), 그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면서 더 좋은 것을 위한 수단으로서 좋은 것이다.


본래적으로 좋은 것과 도구적으로 좋은 것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은 그 자체로 욕구할 가치가 있거나 (바람직한 것이고 나)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어떤 것은 단지 그것의 결과 때문에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래적으로 좋은 것은 그것의 본성 때문에 좋은 것이다. 그것의 좋음은 다른 좋은 것들로부터 파생되지 않는다. 반면에 도구적으로 좋은 것은 그것이 본래적으로 좋은 것을 획득하는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에 바랄 만한 것이다.


우리는 나아가 좋은 도구와 도구적 선을 구별할 수도 있다. 만약 어떤 것이 도구적 선이라면 그것은 본래적으로 좋은 어떤 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단순히 좋은 도구라는 것은 어떤 목적 - 좋든 나쁘든 간에 -에 대한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독은 어떤 사람을 살해하는데 좋은 도구이다. 그러나 살인은 본래 좋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독은 적어도 이러한 사용에 있어서 도구적 선은 아니다.

 

우리가 가치를 부여하는 많은 것들은 도구적 가치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국가에서 발췌한 부분에서 의약과 돈, 두 가지 도구적 가치를 언급한다. 의약은 그 자체로는 거의 가치를 부여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도구적 선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의약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대답은 이렇다. 그것은 건강을 증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건강은 본디 가치인가 도구적 가치인가? 즉, 우리는 "건강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 고, 행복과 창조적인 활동과 같은 다른 것들을 위해서도 역시 좋은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반박할 것이고, 건강은 완전히 도구적 선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돈은 소크라테스가 들고 있는 도구적 가치의 또 다른 예이다. 돈이 그 자체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즉, 우리들 대부분은 돈의 구매력 때문에 그것에 가치를 부여한다. 우리가 돈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라고 물을 때, 우리는 음식과 옷, 집, 그리고 자동차, 오락거리, 교육과 같은 좋은 것들을 대답으로써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 중 어떤 것은 정말로 본디 선인가, 아니면 그것들은 모두 도구적 선인가? 예를 들어, 우리가 오락거리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라고 물을 때, 우리는 어떤 대답을 만나게 되는가? 우리 중 대부분은 본디 선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예인 즐거움이나 쾌락을 언급할 것이다. 우리는 더 물을 수 있다. 즐거움이나 쾌락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우리는 이 물음을 다음 절에서 검토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는 본디 가치라는 개념이 도대체 말이 되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본래적 가치는 있는가? 그것의 가치가 그 밖의 어떤 것으로부터 파생되지 않는 - 즉, 그 자체로 추구되는, 본래부터 선인, 그 자체로 선인 어떤 실체가 있는가? 혹은 모든 가치는 바라는 사람들에게 상대적인가 - 즉, 선택하는 사람이 만들어 낸 목적을 위한 수단적인 것인가? 본래적 가치의 개념을 지지하는 사람은 보통 쾌락이 본래적 가치의 한 예이고, 고통이 본래적 부정적 가치의 한 예라고 주장한다. 쾌락을 경험하는 것은 선이고, 고통을 경험하는 것은 악이다. 물론 이러한 철학자들은 개별적인 쾌락의 경험이 악일 수도 있으며(왜냐하면 그것들은 결과적으로, 마치 술을 실컷 마시고 난 다음에 숙취가 오는 것과 같은, 어떤 다른 부정적 가치를 가졌을 것이기 때문에), 개별적인 고통의 경험이 가치 있을 수 있다는 전(예를 들어, 생명을 구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수술을 받는 것)을 인정한다. 본래적 가치론자들은 쾌락이 고통보다 분명히 더 좋다고 단언한다.


우리는 이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는 쾌락이 선이라는 것 혹은 불필요한 고통이 본래부터 악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어떤 논증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한 어른을 보고서 그에게 당장 그만두라고 명령한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그가 '나는 그 애 이가 심한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왜 내가 그 애 이를 괴롭히는 것을 그만두어야 하는가? 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그가 정신이상은 아닌지 의심할 것이다.


비본래적 가치론자들은 위의 논증들이 설득력을 가진다는 것을 부정한다. 경험 자체가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은 분명하지 않다. 단지 우리가 고통보다는 쾌락을 선택한다는 것에 의해서 가치의 개념이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가치가 외재적인 것이거나 선택의 산물이다. 많은 실존주의자, 그중에서도 특히 사르트르는 우리가 임의적인 선택을 통해 가치를 만들어 낸다고 믿는다. 우리의 가치를 창조하고 그 결과 우리 자신을 규정할 자유는 신과 같은 것이고, 동시에 이것은 매우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 이외에는 우리의 잘못을 비난할 누구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롭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가치는 당신이 선택한다는 의미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자유에 근거하여 행하는 한 우리는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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