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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쾌락주의와 가치론, 마조히즘의 역설

by 형티처 2023. 1. 11.

우리는 우리의 가치의 대부분을, 우리가 두 가지 다른 전공 중에서 선택하거나 혹은 식사와 함께 수프를 먹느냐 아니면 샐러드를 먹느냐를 선택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선택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쾌락, 건강, 행복, 그리고 사랑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고, 고통과 괴로움을 가치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근본적인 가치들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그것들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우리를 선택한다. 가치를 선택하는 사르트르적 조건인 자유조차도 우리가 선택하는 가치가 아니라 우리의 본성에 의해 우리에게 깊이 내재하여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가치 때문에 우리의 자유를 무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용할 음식이나 음료를 박탈당한 후에 배고플 것인가 혹은 목마를 것인가를 선택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에 가치를 부여하느냐 부여하지 않느냐를 선택할 수는 없다. 그것은 마치 신 혹은 진화가 우리에게 이러한 기초적인 선을 욕구하도록 미리 프로그래밍한 것과 같다. 그리고 우리가 행복, 자유, 혹은 사랑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혹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발견할 때, 우리는 이러한 예외적인 사람을 불행한 환경의 산물로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철학자들은 크게 쾌락주의자와 비쾌락주의자, 두 진영으로 나뉜다. 쾌락주의자는 모든 쾌락이 선이며, 쾌락은 그 자체로 선한 유일한 것이고, 모든 다른 선한 것은 이 가치로부터 파생된다고 주장한다. 어떤 경험이 쾌락을 제공할 때, 오직 그때에만 그리고 그것이 쾌락을 제공하는 만큼만 그 자체로 선이다.
때때로 이러한 정의는 고통 - 고통은 그 자체로 나쁜 것으로 간주하는 유일한 것인바 - 의 경감을 포함하는 데까지 확장된다. 논의의 단순화를 위해서. 우리는 앞의 정의를 사용할 것이다. 단, 쾌락에 관한 정의는 고통을 참조해서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염두에 두면서 말이다.
쾌락주의자들은 다시 다음과 같이 나누어진다. (a) 감각주의, 이 견해는 모든 쾌락을 감각적 즐거움과 동일시한다. (b) 만족주의, 이 견해는 못 든 쾌락을 만족 혹은 즐거움과 동일시한다. 그것은 감각적 자극을 포함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족은 마치 우리가 선물을 받거나 혹은 힘든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난 이후에 경험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의식의 쾌락적인 상태이다. 감각적 즐거움의 반대는 신체적 고통이다. 만족의 반대는 불쾌 혹은 불만족이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티포스는 감각주의자들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즉, [그에 의하면] 유일한(혹은 제일의) 선은 감각적 쾌락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은 그것의 강도에 의해 정의된다.
이것은 또한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에 나오는 무스타파 몬드의 철학이었다. 멋진 신세계는 사람들이 면역 체계, 유전 기술, 행동 수정을 통하여 질병, 폭력, 범죄로부터 자유로운 미래의 사회이다. 그곳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도취적 행복감을 제공하는 약물인 소마를 통해서 우울과 불행으로부터 보호받는다. 명민한 두뇌를 가진 그 사회의 관리자 무스타파 몬드는, 가치 있는 어떤 것이 이러한 "유토피아'에서는 사라져 가고 있다고 불평하는 소수의 불평분자의 한 사람인 야만인에 반대하여, 이러한 쾌락주의적인 유토피아를 옹호한다. 다음 대화는 멋진 신세계를 통치하는 천재적인 기술 관료인 무스타파 몬드와 이러한 쾌락적인 낙원은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고 믿는 불평분자 야만인이 주고받는 것이다.

야만인 : 그래, 정말 당신다운 이야기십니다. 불쾌감을 안겨 주는 것이면 참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모두 제거한다는 말씀이시군요. 포악한 운명의 돌팔매나 화살을 참을 것인가 아니면 고난의 바다를 향해 무기를 높고 싸워 그것을 근절할 것인가? 하지만 당신은 어느 쪽도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인내도 저항도 하지 않고 계십니다. 돌팔매와 화살을 그냥 포기할 뿐입니다. 그것은 너무 안이하군요... 위험 속에서 삶을 사는 것에도 무슨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무스타파 몬드: 큰 의미가 있는 것이야... 남자고 여자고 때로 아드레날린의 자극이 필요하니까. 그것은 완전한 건강을 위한 한 가지 조건이야. 그래서 우리는 VPS 요법을 강제로 시행하고 있는 것일세.
야만인: VPS라고?
무스타파 몬드: 걱정을 대신해 주는 약이야. 한 달에 한 번씩 규칙적으로. 신체의 모든 조직에 아드레날린이 넘치도록 하는 요법일세. 그것은 어떤 불편함도 없는 공포와 분노의 완벽한 생리학적 대용물일세.
야만인: 하지만 저는 불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무스타파 몬드: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그래...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질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야만인(오랜 침묵 끝에) :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무스타파 몬드(어깨를 으쓱하면서) : 마음대로 하게.

거의 모든 감각적인 것들을 박탈당한 젊은이는(혹은 비슷한 심리적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아마 멋진 신세계가 어떤 것이 없고 있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쾌락을 감각적인 것으로 말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
기원전 3세기 이후 대부분의 쾌락주의자는 쾌락에 대해 더욱 폭넓은 견해를 가졌던 에피쿠로스를 따른다.

유쾌한 삶을 낳는 것은 끊임없이 마셔대거나 흥청거리는 것도 아니고,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도 아니고, 잘 차려진 식탁에서 생선이나 다른 고급 음식을 즐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모든 선택과 회피의 이유를 찾아내고 정신을 대단히 혼란스럽게 만들기 마련인 단순한 의견을 몰아내는 명료한 사고가 유쾌한 삶을 낳는 것이다.

만족으로서의 쾌락과 감각으로서의 쾌락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면 혼란과 역설을 가져온다. 이전의 한 예가 마조히즘의 역설이다. 마조히스트가 쾌락의 정반대인 고통을 즐기는 것(다시 말해, 고통 속에서 쾌락을 얻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쾌락주의자는 이렇게 대응한다. 글쎄, 어떤 심리학적인 이상 때문에, 마조히스트는 (감각으로서) 고통스러운 것을 (만족으로서) 즐긴다." 하지만 그는 (감각으로서) 고통스러운 것을 (감각으로서) 즐기지 않는다. 또한 마조히스트의 행위를 설명하기 위한 두 수준(wo-level)의 분석도 있다. 보다 낮은 수준에서 혹은 기초적인 수준에서 그는 고통 혹은 불만족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높은 수준에서 그는 그러한 고통 혹은 불만족으로부터 만족을 발견하고 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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