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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비쾌락주의의 일원론과 다원론, 쾌락기계와 약물

by 형티처 2023. 1. 12.

비쾌락주의자들은 일원론자와 다원론자의 두 진영으로 나누어진다. 일원론자들은 쾌락이 아닌 단일의 본질적인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아마 그것은 우리가 아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모든 다른 '가치의 토대가 되는 초월적 가치, 즉 '선'일 것이다. 이것이 플라톤의 관점인 것 같다. 다원론자들은 일반적으로 쾌락 혹은 즐거움이 본래적 선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 이외에 지식, 우정, 미적 아름다움, 자유, 사랑, 도덕적 선, 그리고 생명 그 자체와 같은 다른 본래적 선도 있다고 덧붙인다.
벤담와 같은 쾌락주의자는 이러한 성질들이 선이긴 하지만, 그것들의 선함은 그것들이 쾌락이나 만족을 가져온다는 사실로부터 파생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쾌락주의자들은 앞서 언급된 가치들 각각에 관해서 묻는다.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지식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만약 단 하나의 만족이나 즐거움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정말로 선일까? 왜 우리는 뉴욕시에 얼마나 많은 계단이 있는가를 아는 것과 죽음 뒤에 삶이 있는지 없는지를 아는 것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느끼는가? 우리는 보통 첫 번째 종류의 지식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두 번째 종류의 지식은 우리의 즐거움과 관련된다.
쾌락주의자들은 묻는다. 우정과 사랑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만약 우리가 다르게 만들어졌다면, 그래서 사랑과 우정으로부터 어떤 만족도 얻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들은 여전히 가치 있는 것일까? 그것들이 매우 가치인, 중요한 도구적 선인 이유는 대단히 큰 만족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쾌락주의자는 심지어 도덕적 헌신이나 양심도 그 자체로는 선이 아니어지라고 단언한다. 도덕은 본래부터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기여하였을 때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인간의 필요는 만족감을 가져오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생명도 확실히 본래적 선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의 질이다. 아메바 혹은 영원히 혼수상태에 있는 환자는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본래적 가치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로지 의식이 나타날 때만 가치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의식은 만족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다.

비쾌락주의자는 이러한 것이 역직관적이라고 대응한다. 예를 들어, 쾌락기계 속에서 살아갈 가능성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순수하고 지속적인 쾌락을 발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람들이 그 속으로 들어 가게 되는 복잡한 기계 하나를 발명했다. 이 기계는 대뇌피질의 변연계 영역과 뇌의 다른 부분에 전류를 보내는 전극을 부착하는데, 그것이 매우 강력한 쾌감을 만들어 낸다. 사람들이 그 기계로 들어갈 때, 그들은 이러한 환상적인 느낌을 경험한다. 당신은 그 기계로 들어가겠는가?


만약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오로지 쾌락이나 만족이라면, 그때 쾌락 기계는 올바른 선택인 것 같다. 당신은 당신이 지금까지 꿈꿔 온 모든 쾌락을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이나 좌절 없이 보장받는다. 그러나 만약 당신 것을 하기를 원하고 어떤 존재이기를 원한다면(예를 들어, 좋은 성격이나 인격의 특정한 성질을 가지는) 혹은 실재를 경험하기를 원한다면(예를 들어, 우정과 경쟁), 그때 당신은 이 선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것이다. 쾌락기계는 알코올, 헤로인, 코카인 아니면 크랙과 같은 마약이나 아니면 다른 중독 약물에 불과하지 않은가? 일단 기계 안에 있으면, 우리는 그것에 영원히 중독될 것인가? 더 나아가, 만약 당신이 원하는 것의 전부가 쾌락이라면, 왜 당신을 평생 간지럽힐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가? 그것이 비록 쾌락을 가져다준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수동적인 보잘것 없는 존재가 되는 것에 싫증을 내지 않을까?
우리들 대부분은 약 먹은 바퀴벌레와 같은 그런 실존을 거부할 것이다.


아니면 똑같은 사람 수와 똑같은 쾌락의 총량을 가진 두 세계가 있다고 생각해 보라. 1번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심지어 악하기조차 하다. 반면에 2번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철저하게 도덕적이다. 2번 세계가 1번 세계보다 본질적으로 더 선한 것 같지 않을까?
아니면 두 삶을 상상해 보라. 수지의 삶과 이지의 삶이 있다. 수지는 100헤돈(쾌락의 단위)을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지능이 떨어지고 신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이지는 명석한 두뇌와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단지 99헤돈을 가지고 있다. 이지가 더 좋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그러나 쾌락주의자들은 수지의 삶이 더 낫다고 말해야만 하는 입장에 있는데, 이는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인다.


이러한 인식에서, 밀도 자기 대표작인 "공리주의에서 만족스러운 돼지가 되기 보다는 불만족스러운 인간이 되는 편이 더 낫고, 만족스러운 바보가 되기 보다는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편이 더 낫다"고 인정함으로써 쾌락주의의 원리를 수정하게 되었다. 그는 쾌락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하면서, 여러 가지 종류의 쾌락을 경험해 본 사람은 그것들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쾌락의 질의 개념이 쾌락주의를 구할 수 있는가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사람은 쾌락만이 선이라는 생각에 불편함을 느낀다. 좀 더 넓은 개념, 즉 행복이라든가 욕구의 대상과 같은 개념이 "가치"라는 말의 의미를 좀 더 적절하게 표현해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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