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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덕윤리와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의 수용소

by 형티처 2023. 1. 11.

2강
바르샤바 출신의 폴란드 수사인.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는 1941년에 나치에 반대하는 책자를 발간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는 간수로부터 두드려 맞고, 발로 차이고, 채찍질 당했다. 한 수용자가 탈출에 성공하자 그것에 대한 보복으로 다른 수용자 열 명을 굶겨 죽이는 벌이 내려졌다. 줄에서 한 사람씩 열 명의 수용자가 뽑혀 나오자, 콜베 신부는 대열을 뛰쳐나와, 자신이 아내와 자식이 딸린 한 폴란드 수용자를 대신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나는 늙은이요, 아무런 쓸모도 없소. 내 생명은 어떤 목적에도 기여하지 않을 것이요. 마흔다섯 살의 신부가 간청했다. 그의 간청은 받아들여졌고, 그는 다른 아홉 명의 수용자들과 함께 어둡고 축축한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에 던져졌다. 그리고 굶어 죽게 내버려졌다.

일반적으로 이런 벌을 받는 수용자들은 그들의 최후의 며칠을 울부짖고 서로를 공격하며, 절망에 휩싸여 벽을 긁으면서 보내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때, 기적 같은 것이 죽음의 감방에서 들려왔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희미한 노랫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수용자들은 죽음의 골짜기의 그림자를 가로질러 가도록 그들을 온화하게 인도하는 한 목자를, 그들을 위대한 목자인 하느님에게로 인도해 주는 한 목자를 가지게 된 것이다.

나치 경비병들은 자신들이 굶겨 죽이려고 한 수용자들이 죽음 직전에 조용히 찬송가를 부르면서 평화롭게 있는 것을 보고서 아연실색했다. 두려움과 절망의 순간에 사랑과 용기를 자기 가슴에 간직하는 것, 자신을 절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미움을 사랑으로 대신하는 것, 그것은 도덕적 영웅주의의 기적이다. 몇 주 후에 SS 대원들이 의사 한 사람과 살아남아서 나중에 이 사건을 전해 준 수용자 한 사람을 데리고 시체들을 치우기 위해 지하실로 내려갔다. 전등을 비추자 그들은 벽에 기어 버티고 서 있는 해골이 다 된 살아 있는 콜베 신부를 발견했다. 그의 머리는 왼쪽으로 약간 기운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그의 눈은 ss 대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바라보는 것처럼 먼 시선으로 열려 있었다. 콜베 신부의 팔에 독약 주사를 놓자 얼마 안 있어 그는 죽었다. 나치가 굶겨 죽이려 했지만, 그는 죽음에 직면한 굶주린 다른 수용자들을 도와주기 전에는 죽지 않았다.

우리들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고 모방함으로써 배운다. 이것이 덕 윤리학의 전형적 특징이다. 규칙은 도덕적 현실을 단편적이고 부자 연습이란 방식으로 재단하지만, 삶은 전체적인 방식으로 적절한 태도와 성향을 보여 준다. 소크라테스, 예수, 간디, 테레사 수녀, 그리고 콜베 신부의 삶은 도덕적 탁월성이 실현 가능하다는 모범을 보여 주며, 우리로 하여금 이상적 유형의 인간이 되도록 고무한다. 시적으로 표현하면, 그들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보석처럼 우리들의 도덕적 전망을 비춰 주는 사람들이다. 네 개의 박사 학위를 가진 전도유망한 의사이자 음악가였던 슈바이처는 유럽에서의 명성과 부를 거부하고서 자기 비용으로 서아프리카의 프랑스령 랑나르네에서 병원을 열었다. 그리고 그는 생명의 외경 (reverence of life)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아마 서구 문화에서 예수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본보기로서 기여해 온 인물은 없을 것이다. 예수의 이미지가 개인의 도덕적 양심을 어떻게 형성하는가에 대한 예는 폴 레비에 의해 언급되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였을까?"라고 자신에게 물으면서 자신의 양심을 검토하는 습관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무엇이 옳은 것(혹은 선한 것)을 행하는 것인가? 라고 물을 수 있도록 요구하는 정신 상태로 이끌어 준다. 그리고 예수가 무엇을 했느냐는 물음으로부터 그것이 "예수는 실제로 무엇을 했는가? 라는 식의 역사적 질문이 아니라 예수는 이러한 상황에 부닥친다면 무엇을 하였을까?'를 뜻하는 물음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는 단지 몇 걸음만 나아가면 된다. 결국... 그는 그에게 윤리적 표준을 제공해 주는 완벽한 도덕적 존재로서 예수의 이념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성인과 도덕적 영웅들은 세상을 지켜 주는 소금이다.

도덕적 성인들이라는 영향력 있는 한 논문에서 철학자 수전 울프는 도덕적 성인들은 "인생을 유쾌하게 즐길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매력이 없다고, 또한 너무, 너무 착해서? "멍청하거나, 유머가 없거나, 재미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삶은 이상할 정도로 무미건조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맞는 말인가?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의 삶이 "멍청하거나, 유머가 없거나, 재미가 없는가? 우리는 그것을 의심할 수도 있다. 사회의 천민들을 수용하고, 그들의 타고난 존엄성을 발현케 하면서, 이전에는 결코 본 적이 없는 높은 수준의 이타주의를 실천하고, 온몸을 던져 사랑의 정신을 구현한 예수의 삶에는 "이상할 정도로 무미건조한 것'은 하나도 없다. 또한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인도인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고 용기를 주면서, 정의의 이름으로 영국의 제국주의에 불굴의 의지로 맞선 간디의 삶도 그렇다.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경찰견을 막 풀어놓으려고 하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적들을 위하여 조용하고 용기 있게 기도하면서 서 있었던 마틴 루터 킹의 삶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자기 음식과 소중한 물건들을 함께 나누며 나치의 야만성에 의해 비인간화되는 것을 거부했던 아우슈비츠의 믿기 어려운, 가끔은 이름도 없는, 수용자들도 있다. 콜카타의 악취 가득한 슬럼가에서 병에 찌든 채 살아가는 집 없는 생명들을 구하고, 상처 입은 자들을 치료하는 데 자신의 일생을 바친 테레사 수녀의 삶도 그렇다.

이들이야말로 심오한 삶의 방식에 도달한 사람들이고, 도덕이라는 우리의 일상적인 표현을 훨씬 넘어서는 방식으로 선을 실천한 사람들이다. 마치 깜박거리는 촛불보다 밝게 빛나는 태양빛처럼 말이다.

울프는 할리우드의 가장 멋진 스타들과 같이 " 재미있고" "매력적인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성인들은 지루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가 재미있거나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도덕교육과 도덕스러운 발달 또는 도덕적 평가의 기능 때문이지, 어떤 성인이나 도덕적 영웅의 삶이 재미없거나 지루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고유한 도덕적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그들의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20세기에 성인에 가장 가까운 도덕적 영웅의 한 사람인 슈바이처는, 울프가 도덕적 성인에게서 결핍된 것으로 보았던, 어떤 심미적 특질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이 평균적으로 심미적 재능이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성인과 도덕적 영웅들은 단순히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는 것 이상의 영감을 주고 있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더 고귀한 삶의 방식이 우리에게도 가능하다는 살아 있는 증거를 보게 된다. 그들은 도덕적 평범함에 만족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도덕적 고귀함을 열망하도록 자극한다. 이러한 사례들이 주는 교훈은 이렇다.

"이러한 인간들이 유혹을 이겨내고 심오한 도덕적 삶을 살 수 있다면, 우리 또한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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