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종교는 도덕적 삶을 고양하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도덕의 종교 의존성을 말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약하고, 또한 진정한 도덕은 종교와 양립 불가능하다는 세속주의자들의 주장도 그렇다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주장 둘 다 다소 극단적이다. 또한 그들이 결정적인 증거를 문제 삼지 않는 것도 놀라운 것은 아니다. 이제 좀 더 온건한 물음을 제기해 보자. 종교는 적어도 도덕적 삶을 고양하는가?
유신론자는 도덕이 종교에 의해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는 방식이 적어도 여섯 가지는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만약 신이 있다면, 선은 악에 대해 승리할 것이다. 우리는 홀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은 그 전쟁터에서 우리 편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헛되이 싸우고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wiliam James, 1842-1910)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종교가 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증거가 여전히 불충분하다면, 나는 내 [종교적] 본성을 꺼트림으로써 승리하는 편으로 다가가는 내 삶의 유일한 기회를 상실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물론, 그 기회는 세상을 종교적으로 대하려는 나의 열정적인 욕구가 마치 예언적이며 옳은 것처럼 행위를 하는 것에 따르는 위험을 감수하고자 하는 나의 의지에 달려 있다.
선의 궁극적 승리라는 이러한 생각은 다른 사람들이 불의한 세력이 너무 막강해서 대항할 수 없다고 생각한 때, 우리에게 부정의와 잔혹함에향하여 싸움을 계속하도록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 세속주의자들이 러셀의 주장대로 운명에 체념하는 고상한 스토아주의를 받아들이는 반면에, 신앙인들은 지상에서 신의 왕국의 최종적인 승리를 믿으면서 신앙 속에서 살아간다.
둘째,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우주적 정의가 우주를 지배하게 된다. 신의 저울은 완벽하게 균형이 잡혀 있어서 모든 사람이 결국에는 그들의 도덕적 업적에 따라 그들이 받을 만한 것을 받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적 전통에서 신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죄인들을 용서한다는 것은 참이다.
- 그런 경우에 신의 은총은 엄격한 응분 이상이다. 그것은 마치 자비로운 신이 우리가 받아야 할 것보다 덜 보상해 주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선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신은 우리가 받아야 할 것보다 더 많이 줄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장 7절)라는 관념은 유대교, 이슬람도, 기독교, 그리고 대부분의 다른 세계적 종교들에서 강조된다. 힌두교에서 그것은 엄격한 업보의 논리로 수행된다(지금의 당신은 당신이 전생에서 행한 바의 직접적 결과이다. 그리고 당신이 당신의 현재의 생에서 행하는 것은 그 다음 생에서 상속받게 되는 삶의 종류를 결정할 것이다).
세속적 윤리학에 따라다니는 물음 - "왜 나는 비도덕적인 행위로 인해 처벌받지 않을 때도 도덕적이어야만 하는가?"(왜냐하면, 자주 우리는 비도덕적일 때 이득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 에는 이미 대답이 준비되어 있다. 즉, 나는 비도덕으로 인해 벌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신은 나의 일을 판단하는 완벽한 재판관이다. 그래서 나의 좋은 일은 보상을 받을 것이고, 나의 나쁜 일은 벌을 받을 것이다. 선은 진정으로 우리에게 좋은 것이다.
셋째. 만약 유신론이 참이면, 도덕적 이유는 항상 도덕과 무관한 이유들에 우선한다. 나는 이 논쟁을 다음의 사례로 설명해 보겠다. 나는 나의 선생인 옥스퍼드 대학의 포트와 함께 고갱(Paul Geuguin)의 경우에 대해서 논쟁한 적이 있다. 고갱은 그의 가족을 버리고 파리로 갔고, 그런 다음 그의 예술적 꿈을 완성하기 위해 타히티로 갔다. 나는 모든 것을 고려 해 볼 때, 고갱이 그의 가족을 버린 것은 잘못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포트는 고갱이 도덕적으로 그른 것을 했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그는 옳은 것을 했다고, 그 이유는 때때로 도덕과 무관한 이유가 도덕적인 이유에 우선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세속적 관점에서 포트의 논증은 그럴듯해 보인다. 왜 도덕적 이유가 항상 도덕과 무관한 이유에 우선해야 하는가? 여기에 세속적 윤리학의 딜레마가 있다. 우선성이거나 객관성이지 동시에 둘 다는 안 된다. 만약 당신이 도덕원리들은 어떤 사람이 그것들을 인정하는가? 여부와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타당하다는 윤리의 객관성을 믿는다면, 세속주의자들은 "왜 내가 도덕원리를 위반해도 벌 받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을 때, 주어진 도덕원리를 지켜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에 직면한다. 만약 당신이 우선성을 지킨다면 - 즉, 만약 당신이 도덕적 이유는 항상 최고의 동기부여를 하는 이유라고, 즉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최선의 이유라고 믿는다면 -, 그때 우리는 도덕에 관하여 일종의 행위자-상대성을 채택하는 것과 유사할 것 같다. 하지만, 종교적 관점에서 세계는 너무나 질서가 있어서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을 좀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도덕적이라는 것은 적절히 기능하는 것, 즉 신이 우리에게 살아가도록 의도한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신은 선한 사람이 궁극적으로 보상받고 악한 사람이 벌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신은 도덕이 지고의 것임을 보증한다. 도덕적 이유는 항상 다른 이유들보다 우선한다. 우리는 우선성과 객관성 모두를 지킬 수 있다.
넷째, 유신론이 참이라면,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는 신이 있다. - 그의 사랑은 우리를 고무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사랑은 실제로 온 세상을 감싼다. 당신과 나는 우리를 돌보는 그리고 우리의 선을 위해 일하는 천상의 아버지를 가진다. 신앙인 의 삶에는 감사의 마음이 가득 차 있어서 그 혹은 그녀는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해 더 큰 희생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즉, 신앙인은 세속적인 사람이 가진 이유를 넘어서, 심지어 보상과 벌도 넘어서, 도덕적이고자 하는 추가적 이유(addled reason)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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