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역사적으로 덕 이론은 2000년 동안 도덕철학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해왔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철학자들은 덕을 그들의 사상 체계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간주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지 않는 철학자들조차 덕에 최고의 지위와 역할을 부여하였다. 토머스 홉스가 좋은 예이다. 홉스에게 있어 도덕은 우리가 전쟁 상태를 버리고 평화 상태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할 때 서로 맺게 되는 일련의 사회계약으로부터 발생한다. 우리는 계약을 지키기로 동의하고, 상대방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보이고, 사교적이고, 상대방에 대해 적의의 신호를 드러내는 것을 피하고, 각자의 차이점을 인정하는 등의 평화를 보장하는 몇 가지 규칙들을 지킨다. 그러나 홉스는 도덕철학의 주된 임무는 그러한 구체적인 규칙들을 자연스럽게 지킬 수 있도록 하는 정의, 감사, 사교성 등과 같은 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홉스에 의하면, 우리는 또한 부정의, 자만, 오만 등과 같이 이러한 규칙들에 따라 행위를 하는 것을 방해하는 악덕을 멀리해야 한다. 홉스에게 있어 덕은 평화를 유지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그러나 덕 이론에 대한 태도는 18세기에 공리주의와 칸트주의가 등장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공리주의 철학자들, 그중에서도 벤담과 밀은 우리의 행위 결과가 쾌락을 주는지 아니면 고통을 만들어 내는지가 도덕에서 관건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덕은 그러한 평가를 하는 데 있어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 밀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윤리적 표준도 어떤 행위가 좋은 사람 혹은 나쁜 사람에 의해 행해졌다는 이유로 그것을 좋은 행위 혹은 나쁜 행위로 결정하지 않는다. 그 행위가 상냥한 사람, 용감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에 의해서 행해졌거나 아니면 정반대의 사람에 의해서 행해졌다는 이유로 그렇게 결정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러한 고려 사항들은 행위의 평가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도덕의 핵심은 우리가 정언명법을 통해서 이성적으로 발견하는 도덕법칙을 따르는 우리의 의무이다. 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도덕법칙을 따르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칸트는 주장한다. 예를 들어, 명백히 자신의 도덕적 의무를 행하지 않는 성공한 악당도 냉철함의 덕을 가질 수는 있다.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지배적인 윤리 이론으로서 등장한 공리주의와 칸트의 의무론을 따르는 많은 이론가는 덕 이론을 윤리학의 새로운 분야로 보기에는 적절치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무시해 버렸다. 하지만 최근 수십 년 동안 덕 윤리학은 주요한 윤리 이론으로 재부상하였다. 주된 이유는 사람들이 공리주의자와 칸트주의자의 도덕 이론에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본질적으로 도덕 이론에 접근하는 두 가지 일반적인 방법이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하나는 행위 중심 접근법으로, 공리주의자와 의무론자에 의해 주장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덕 중심 접근법으로, 덕 이론가들에 의해 주장된 것이다. 그들의 극단적인 형태에 있어서. 양자의 주요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덕 윤리학은 행위자(행위자의 성격)에 중점을 두고, 단지 행위를 하는 것 (doing)보다는 어떤 사람이 되는 것(being)을 강조한다. 이러한 접근법의 가장 중요한 도덕적 물음은 "나는 어떤 부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덕 중심 체계는 때때로 덕 윤리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반대로 행위 중심 이론들은 공리주의적 원리나 정언명법과 같은 도덕 규칙에 따라 행위를 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접근법의 가장 중요한 물음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다. 이러한 이론들은 규칙에 따라 행위를 할 것을 강조하는 것 때문에 때때로 규칙-지배적 이론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혹은 의무적 이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우리가 다음에 할 일은 최근의 덕 이론가들이 공리주의와 칸트주의의 행위 도덕 이론에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최근의 덕 이론가들은 행위 중심 윤리학이 영감을 주지 못한다고, 심지어 지루하고, 대개는 부정적이라고 주장한다. 행위 중심 윤리학은 행위를 동기화하고 고무하는 데 실패한다. 윤리학은 일종의 공리공담, 도덕적 결의론, 여하튼 도덕의 전체 목적의 궤도를 이탈한 쓸데없이 사소한 구별을 일삼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규칙을 행위로 나아가게 하는 성품이라는 발전기가 없다면 그런 규칙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의무론적 체계들이 동기부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일반적인 부정적 특징에 의해 예정된다. 그런 체계에서 대부분의 명령과 규칙들은 본래 너는 ~하지 말라"와 같은 부정적 형식을 떤다. 밀이 빅토리아 시대의 소위 기독교 도덕에 대해 불평했듯이,
기독교 도덕은 반동의 모든 특징들을 다 가지고 있다. 그것은 대부분 이교도에 대한 저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의 이상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며, 적극적이기보다는 소극적이다. 고귀함보다는 죄 없음을, 적극적인 선의 추구보다는 악의 억제를 이상으로 삼는다. 그것의 계율에 있어서 '너는 ~하지 말라'는 너는 ~하라' 보다 부당하게 우세하다. 관대함, 고귀한 마음가짐, 인간의 존엄성, 심지어 명예조차도, 그것이 무엇으로 존재하든지 간에, 우리 교육의 종교적 부분이 아니라 순수하게 인간적 부분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공공연히 인정되는 유일한 가치가 복종뿐인 그런 표준적인 윤리학에서는 결코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열정적인 선의 추구" 보다 죄 없음을 강조하면서, 지나치게 "너는 ~하지 말라'를 강조하는 도덕에는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있다. 의무론적인 체계는 이기주의적인 최소 도덕에 초점을 맞춘다. 최소 도덕의 기본 원리 들은 적극적이기보다는 예방적인 것으로 보인다. 유일하게 확실한 원리는 해를 끼치지 말라는 상호 의무이다. 이러한 종류의 이론은 도덕을 기본적으로 필요악으로 판단하여, 도덕에 대해서 매우 낮은 가치를 부여한다. 덕 윤리론자들은 이러한 판단을 거부하고, 도덕을 본질적으로 할 만한 가치가 있는 활동으로 간주한다.
'윤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턴과 최소주의 윤리, 최대주의 윤리 (0) | 2023.01.11 |
---|---|
앤스콤과 근대도덕철학, 허클배리핀 (0) | 2023.01.11 |
덕윤리와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의 수용소 (0) | 2023.01.11 |
유신론자의 도덕적 이점 6가지 (1) | 2023.01.11 |
종교는 도덕적 삶을 고양하는가? (0) | 2023.01.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