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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덕윤리와 윤리학 복습

by 형티처 2023. 1. 10.

1강
존은 에티오피아에서 십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는 이것에 대해 깊은 슬픔을 느끼고, 그가 열심히 번 돈에서 백 달러를 에티오피아 기근 구제 사업에 보낸다. 조안은 똑같은 뉴스를 들었지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의무감에서 자신이 열심히 번 돈에서 백 달러를 에티오피아 기근 구제 사업에 보낸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 보자. 책과 질은 그들이 일하는 은행에서 백만 달러를 횡령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질은 그 돈을 횡령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횡령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녀의 선택 사항이 아니다. 잭은 그 유혹과 씩씩하게 싸우지만 거의 굴복할 뻔하다. 그러나 대단한 의지의 노력으로 마침내 그 유혹에 저항하는 데 성공한다.

이 경우에 더 도덕적인 사람이 있다면, 그는 누구인가? 우리는 대부분 존과 질이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도덕적 확신을 내면화하여 그 상황에 대하여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어떤 갈등도 느끼지 않고 자발적으로 옳은 것을 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존과 질은 우리가 덕이라고 부르는 특별한 도덕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덕은 도덕적 선을 습관적으로 행할 수 있는 훈련된 행동 성향을 말한다. 덕과 반대되는 정신적 특성은 악덕이다. 악덕은 도덕적 악을 습관적으로 행할 수 있는 훈련된 행동 성향이다. 덕이론. 혹은 덕윤리학이라고 불리는 윤리학의 전반적인 체계는 이러한 개념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것의 주요 논제는 도덕이 훌륭한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인데, 그런 사람들은 자발적인 선함에서 잘 행위하고 타인에게 영감을 주는 모 법이 된다. 예를 들어. 존과 질은 그들의 선한 성품이 그들이 옳은 것을 자발적으로 하게끔 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들이다.

덕 윤리학에는 목적론적인(즉, 목적 지향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행위가 행복이나 공리를 극대화할 것인지를 묻는 공리주의에서 발견되는 그런 목적론과는 다르다. 그러한 목적론과는 달리 덕에 토대를 둔 목적론의 개념은 오히려 삶의 목적(잘 사는 것과 훌륭함을 성취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덕 이론가들에 따르면, 이상적인 도덕적 인간은 다양한 종류의 덕을 쌓아야만 한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4주 덕이라고 불리는 짧은 덕의 목록을 제시하였다. 4주 덕은 지혜, 절제, 용기, 정의이다. 또 다른 간단한 목록은 사도 바울이 신약 성경에서 제시한 믿음, 소망, 사랑이다. 이것은 신학적 덕이라고 불려 왔다. 수 세기 동안 4주덕과 신학적 덕의 목록은 서구 문명의 도덕 이론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해 왔다. 우리는 또한 동양의 도덕적 전통에서도 덕을 대단히 강조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힌두교는 비폭력, 진리, 순수, 자기 통제 등의 덕을 주창하고, 공자는 예의바름, 관대함, 정직, 인내, 친절 등의 다섯 가지 특성들로 구성된 완벽한 덕에 관해 언급했다. 이러한 덕의 목록들이 서로 강조하는 부분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것들은 모두 자신의 욕구를 제어하고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흔들리지 않는 행동 습관을 강조한다.

우리는 이 장에서 덕 윤리를 검토할 것이다. 먼저 덕 윤리학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할 것이고, 다음으로 최근에 덕 윤리학과 다른 경쟁 윤리 이론 사이에 나타나고 있는 논쟁을 살펴볼 것이다.

덕 윤리학의 본질

덕 윤리학은 올바르게 행위하고 선한 사람이 되는 데 있어서 옳은 것을 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적절한 성향, 동기, 감정을 가지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훔치거나, 거짓말하거나, 속이려는 유혹조차 받지 않는 것이며, 우리가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덕 윤리학은 행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감정, 성품, 도덕적 습관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것은 이상적인 인간이 되기를 열망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덕은 습관적 행위의 결과로 생기는 성품의 훌륭함이자 훈련된 행동 성향이다. 전통적으로 그것은 도덕적 덕과 도덕과 무관한 덕,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져 왔다.

다양한 덕을 정확하게 분류하는 것은 논쟁이 될 수 있다. 용기는 때때로 도덕적 범주에 속한다. 그리고 (불편부당한 선의에 반대되는) 친절과 같은 덕은 양 범주 어디와도 잘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 덕은 도덕적 삶에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 그리고 비도덕적인 삶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과 보다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도덕과 무관한 덕은 비도덕적 목적을 위해 더 쉽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도덕적 덕들조차도 나쁜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대부분의 덕 체계들이 행위의 지침으로서 작용하는 행위의 원리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원리나 규칙의 실재가 도덕의 본질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무엇을 할 것인가의 대한 추리가 때로는 적절하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추리와 숙고는 또한 동정심과 충성심과 같은 감정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추상적인 이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훌륭한 인간의 유형이다. 그러므로 적절한 도덕적 모범을 발견하고 모방하는 것이 지나치게 자세한 이성적 추리를 대신하여 도덕적 삶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된다. 결국 이상적 모델을 모방함으로써 받게 되는 도제식의 덕의 훈련이 선한 것을 자연스레 행하는 유덕한 인간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러한 내용을 좀 더 집중해서 살펴보는 두 가지 상이한 방식이 있다. 하나는 이상적 인간의 유형을 탐구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이상적인 어떤 사람을 따르는 방식이다. 이것들을 차례대로 검토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에 관한 고전적 저작인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덕은 간단히 말해 개인들을 공동체에서 잘 살 수 있게 해 주는 그런 특징들이다. 잘 사는 상태(그리스어로 eudaimonia, 이것은 "행복" 혹은 "인간적 번영'을 의미한다)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사회 제도들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도덕적인 사람은 그 혹은 그녀가 선한 삶을 위해 필수적인 덕을 계발할 수 있게 하는 번영하는 정치적 환경과 떨어져서는 실제로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윤리학은 정치학의 한 분야로 생각된다. 국가는 선한 삶을 지향하는 데 있어 중립적이지 않고, 덕을 가지도록 시민들을 적극적으로 격려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것들이 정치 질서의 번영에 대한 최상의 보증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성은 하나의 본질 혹은 기능을 가진다. 의사의 기능이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시키는 것이고, 통치자의 기능이 사회를 잘 다스리는 것이고, 칼의 기능이 잘 자르는 것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기능은 좋은 삶(eudatimonia)을 추구하는 데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다. 덕은 사람들이 행복을 얻는 데 있어 필수적인 일종의 도덕적-정치적 특성을 가리킨다.

윤리학을 정치학의 한 분야로 설정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 덕이 지적인 덕과는 다른 것임을 설명한다. 지적인 덕이 직접적으로 가르쳐질 수 있는 반면에, 도덕적 덕은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잘 사는 것을 통해 우리는 올바른 습관을 획득한다. 이러한 습관들이 사실 덕이다. 덕은 행복에 대한 최상의 보증으로서 추구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다시 행복은 번영하는 국가에서 살 만큼 충분히 운이 좋기를 요구한다. 도덕적으로 덕 있는 삶은 중용에 따라 적절한 삶을 사는 데 있다. 중용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미하는 바는, 덕은 과도와 결핍 사이의 중간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용기는 비겁과 무모함 사이의 중간이다. 관수함은 인색함과 절제되지 않은 퍼주기 사이의 중용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사람들이 유덕해지는 데 있어서 능력이 동등하지 않다고 믿은 엘리트주의자였다. 어떤 사람들은 대단한 능력을 부여받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전혀 가치가 없는 자연적인 노예이다. 외적 환경은 도덕적 성향을 계발할 수 있는 사람조차도 행복의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다. 도덕적 덕은 행복을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우리는 덕 있는 것에 덧붙여 건강해야 하고, 재산이 있어야 하고, 지혜로워야 하며, 또한 운이 좋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도덕 규칙이나 원리를 거의 언급하지 않은 사실은 오늘날의 윤리학자들에게는 매우 놀라운 일인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원리 들을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원리들은 그가 말하는 것 속에 암시되어 있다. 예를 들어, 간통에 대한 그의 비난은 하나의 원리로서 읽을 수 있다("간통하지 말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활동들이 본래 그리고 명백히 나쁜 것이어서 간통을 반대하는 혹은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반대하는 원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괜한 노력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원리 대신에 좋은 양육, 좋은 습관, 자기-통제, 용기와 성품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그것들이 없이는 윤리적 삶은 불가능하다. 도덕적으로 탁월한 사람은 선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계절의 변화나 행성의 운행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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