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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신명론과 칸트와 러셀

by 형티처 2023. 1. 11.

2강
우리가 도덕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신명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도덕이 다른 방식으로 신에 의존하는지를 물을 수 있다. 독일 철학자 칸트는 도덕은 신에 의존하고 있고, 윤리학이 의미 있기 위한 유일한 가능성은 종교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칸트는 신명론 이론가는 아니다. 그는 독립성 논제를 확고히 고수한다. 타당한 종교적 윤리학과 타당한 철학적 윤리학에는 어떤 차이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신과 인류는 모두 동일한 이성적 원리에 복종해야만 하고, 이성은 우리를 이러한 원리로 안내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전에 철학이 제공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명확하고 순수한 개념들로 철학을 풍부하게 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있다면, 이성(Reason)이 자유롭게 그것에 동의하고, 이성이 스스로 환영할 수 있는, 그리고 이성이 소개할 수 있고 소개해야만 하는 그런 개념들로 생각된다... 복음서의 성인도, 우리가 그를 성인으로 인지할 수 있기 전에, 먼저 도덕적 완성에 대한 우리의 이상과 비교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칸트는 종교가 도덕을 영혼 불멸 그리고 신의 현존과 직접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완전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영혼 불멸이 다음과 같은 도덕의 필연적 요청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완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해야 한다'는 "할 수 있다'는 것을 합의하므로, 우리는 도덕적 완전성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일은 무한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현세에서는 완전성을 획득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이상을 향한 도전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내세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이와 유사하게, 도덕법을 강제하는 누군가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신도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즉, 도덕법이 완전히 정당화되기 위해서, 최종적으로 도에 일치하는 행복이라는 정당한 보상으로 귀결되어야만 한다. 칸트는 이것을 완전선(complete good) 이라고 불렀다. 영원의 관점에서 완전선은, 행복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도덕적 공적에 비례하여 그것을 받는 그런 방식으로, 행복은 덕에 비례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마찬가지로, 악한 사람은 그 악덕에 비례해서 불행이라는 벌을 받아야 한다.

덕과 행복의 이러한 조화로운 상호 관계는 현세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내세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따라서 도덕법의 강제 자로서, 재판관으로서 신은 존재해야만 한다. 신이 없다면 도덕법은 정당화되지 않을 것이다.

칸트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증명할 수 있다거나 행복하기 위하여 우리가 도덕적이어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의 이념은 우리의 일상적인 윤리학의 이념들을 완전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 이 점에서 칸트는 옳았는가? 비판자들은 칸트의 논증을 그와 반대되는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칸트의 논증을 가장 간단한 형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 만약 도덕이 의미 있다면, 그때 신은 존재한다.
(2) 도덕은 의미 있다.
(3)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논증을 위해, 도덕의 정당화는 신의 현존에 의존한다는 칸트의 주된 전제1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자. 하지만 우리는 신의 현존에 관한 어떠한 확신도 발견하지 못한다고 가정해 보라. 전제 1을 그대로 두면서도, 우리는 도덕을 거부하는 다음과 같은 논증을 구성할 수 있다.

(1) 만약 도덕이 의미 있다면, 그때 신은 존재한다.
(2)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3) 그러므로 도덕이 의미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동일한 종류의 반대 논증이 영혼 불멸에 대해서도 구성될 수 있다. 칸트의 견해에 대해, 비판자들의 요점은 도덕과 신이 함께 성립하고 몰락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의 현존과 같은 논쟁적인 이슈에 도덕을 앉히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국 철학자 러셀(B. Russel, 1872-1970)은 20세기에 종교에 대해 가장 목소리를 높인 비판자 중 한 사람이었다. 유명한 한 에세이에서, 그는 전체적으로 종교는 문명화에 쓸모 있는 공헌을 실제로 단 하나도 하지 않았고, 사실 셀 수 없이 많은 고통의 원인이었다고 말했다.

종교에 대한 나의 견해는 루크레티우스(Lucreius)와 같다. 나는 그것을 공포로부터 태어난 질병, 인류에게 말할 수 없는 비참함을 안겨 준 원천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문명화에 어떤 공헌을 해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초기에 역법을 확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집트 승려들이 일식을 주의 깊게 기록하도록 하였고, 일식의 발생을 제때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두 가지 봉사는 내가 기꺼이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이와 다른 어떤 공헌이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종교와 윤리학의 관계에 대한 주제에서, 그는 도덕에 신은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도덕적일 수 있고, 심지어 스토아적인 사려 깊은 체념의 한계 속에서라면 행복할 수도 있다. 세계는 맹목적인 진화론적 투쟁의 산물이며, 궁극적으로 부조리한 것이라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삶을 의미와 선으로 채워야 한다는 우리의 의무를 제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신론자들은 러셀과 같은 세속주의자들이 "어둠 속에서 휘파람이나 불고 있다"고 반격한다. 마브로즈(G. Marrodes)는 러셀의 세속적 관점이 종잡을 수 없다고 비판한다. 만약 신이 없다면, 세속 윤리학은 어떤 부적절함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지 않겠는가? 마브로즈는 러셀주의자들의 세속적 도덕의 세계는 "왜 나는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만족스럽게 대답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유인즉, 일반적으로 도덕이 목적으로 하는 공공선은 때때로 우리가 우리의 도덕적 의무를 수행하면서 우리를 희생하게 되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우리의 도덕적 의무 때문에 우리의 복지나 자기 이익을 희생해야만 하는가?

마브로즈에 따르면, 세속 윤리학에서 두 번째로 이상한 것은 그것이 피상적이고 심오한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플라톤적인 세계관(즉, 실재와 가치는 본질적으로 초월적 영역에 존재한다는 견해) 혹은 유대-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해 제공되는 필연적인 형이상학적 토대가 결여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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