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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행복과 윤리, 플라톤과 롤스

by 형티처 2023. 1. 17.

결국,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삶이 가장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물어보기를 원하게 된다. 이미 오래전에 아리스토텔레스(384-322 BC)는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행복이라고 말했다.

행위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모든 좋음 중에 최상의 것은 무엇인지 논의해보자.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 대중들과 교양 있는 사람들 모두 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하고, '잘 사는 것'과 '잘 행위를 하는 것'을 행복하다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대중들과 지혜로운 사람들이 동일한 답은 내놓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누구나 알 수 있는 어떤 것을, 가령 즐거움이나 부나 명예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논의는 다시 객관주의자, 주관주의자, 그리고 조합 이론가에 따라 갈린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객관주의자들은 행복을 쾌락과 구별하고 인간 본성의 유일한 이상적인 모습에 대해 말한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이상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행복은 쾌락이나 만족과 같은 단순히 주관적인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본질적인 본성을 이해하는 경우에 우리가 모두 살기를 원하는 그런 종류의 삶이다. 칼, 포크, 바퀴가 그것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종을 포함한 생물의 종들도 역시 그렇다. 우리 인간의 기능(때때로 우리의 "본질" 이라고 불리는)은 이성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일종의 고도로 이성적이고 교육받은 존재가 된다. 우리가 덕스러운 삶을 사는 이상을 수행할 때, 우리는 정말로 행복한 것이다.


플라톤은 행복을 '영혼의 조화'로 설명했다. 우리의 신체가 그 자체로 조화로울 때 건강한 것처럼, 그리고 국가가 그 기능이 조화롭게 수행될 때 좋은 국가인 것처럼, 영혼도 그것의 모든 특징적인 부분들이 조화롭게 일치를 이루면서 기능할 때, 즉 이성적인 능력이 기계적인 요소와 감정적인 요소를 지배할 때 행복한 것이다. 우리가 비록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가 언제 행복하고, 언제 좋은 느낌이 드는가를 의심의 여지 없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관적인 느낌이 그 자체로 행복을 정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탁월함을 달성하지 못하는 사람들 또한 자기기만과 무지로 인해 행복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객관주의자의 견해는 미리 정해진 본질이나 기능의 의미를 훼손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진화론적인 설명의 등장을 반기지 않는다. 과학은 못 든 사람들이 도달하려고 애쓰는 어떠한 내재적인 목적 내지 목표도 발견할 수 없다. 오늘날의 심리적 편향은 가치 다원주의, 즉 행복을 발견하는 많은 방법이 있다는 견해에 우호적이다. "수천 가지 꽃들이 만개하게 하라?" 이것은 주관주의로 이어진다.


행복에 대한 주관주의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행복은 보는 자의 눈에 달려 있다. 당신은 정확히 당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행복하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러한 개념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1인칭적인 평가이다. 나는 내가 행복한지 아닌지를 알거나 결정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만일 내가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그 밖의 다른 모든 사람이 나의 삶의 양식을 멸시하더라도, 나는 행복하다. 우리가 만약 덕스럽다면, (우리의 사회적 본성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을 더 좋게 느끼리라는 것이 통상적으로 밝혀진다고 할지라도, 논리적으로 행복과 덕은 무관하다.


조합 이론과의 견해는 객관주의자들의 견해와 주관주의자들의 견해 양자를 통합하려고 노력한다. 하나의 예가 행복에 대한 롤스의 "인생 계획이라는 개념이다. 각각의 사람들에게 개방된 인생 계획의 다양성이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계획이 그 사람에 의해 자유롭게 선택된 통합적인 전체라야 한다는 것과 그 사람이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 성공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그 사람을 목적이나 계획의 자율적인 선택자로서 인식한다는 점에서 현저하게 주관적이다.

 

한 개인이 인생 계획을 선택하는 데 있어, 그의 유일한 쾌락이 공원 광장이나 잘 정돈된 잔디밭과 같은 다양한 기하학적 모양의 풀밭에서 풀잎을 세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선에 대한 우리의 정의는 우리가 이 사람에게 있어 선은 실제로 풀밭의 풀잎을 세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러나 롤스는 다른 방식으로 주관주의적인 도식 안에 객관주의적인 요소를 인정한다.

어떤 가치 있는 인생 계획에도 필수적인 일차적 선의 있다. "권리와 자유, 권력과 기회, 수입과 부, 자기 존중, 건강과 활력, 지적 능력과 상상력" 등이 그것이다. 일차 선은 그것으로부터 어떤 가능한 인생 계획(수레바퀴의 살)이 도출되는 핵심(수레바퀴의 축)으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차적 선(혹은 그것 중 대부분)이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생 계획은 자신의 자아상에 대한 개인의 자율적 선택의 진정한 표현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이 실제로는 행복하지 않을 때도 그들이 행복하다고 믿는 것이 완벽하게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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