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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환원주의적 논제와 도구적 가치 논제

by 형티처 2023. 1. 11.

9강
마찬가지로, 비록 가끔 덕 없는 사람이 옳은 행위를 하고 유덕한 사람이 그른 행위를 해서 우리를 놀라게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덕이 없다면 우리는 옳은 행위를 기대할 수 없다. 밀접한 인과적 연관성 때문에, 선의지가 그른 것을 하고, 악하거나 무관심한 의지가 옳은 것을 한다는 것은 통계학적으로 확률이 없다.

둘째, 그 논제는 우리가 어떤 부류의 사람 - 즉, 그들 자신을 위해서 필수적인 성향과 태도를 가진 - 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지 못한다. 그것은 행위를 요구하는 규칙만을 하나하나 상세히 말할 뿐, 도덕적 규칙의 다른 유형들, 즉 덕을 요구하는 규칙들이 있다는 것을 무시한다.

표준적 행위 중심 견해의 두 번째 논제는 다음과 같다.

2. 환원주의적 논제. 도덕적 덕은 도덕 규칙들에 복종하는 성향, 즉 어떤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는 성향이다. 덕의 상응 이론에 따르면, 각각의 덕은 적절한 도덕원리에 상응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덕은 단순히 행위에 적합한 성향인가, 아니면 그 이상인가 - 그것은 행위로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는 태도들을 포함하는가 - 이다. 칸트는 (정념적이고 감정적인 의미에서) 사랑은 명령받을 수 없기 때문에 도덕적 의무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직접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덕법은 나에게 나의 수입의 일부를 가난한 사람들을 부양하는 데 쓰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내가 가난한 사람들을 좋아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그들에게 나의 돈을 준다.

다원주의 윤리학자는 이러한 종류의 생각을 거부한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직접 통제 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그것을 간접적으로 통제한다. 우리는 우리의 성향을 수도꼭지처럼 들었다. 잡자고 하다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옳은 성향과 태도를 계발하는 단계를 밟을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들의 적절성을 인식한다면, 올바른 방식으로 그러한 태도를 지니기 위하여 우리는 생활, 공감적 상상, 그리고 정신의학적 치료(만약 우리가 종교적이라면, 기도)를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성품에 책임이 있다. 우리는 선한 사람이기만 해서는 안 되고, 선을 사랑해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추함을 미워하는 것은 탁월함에 이르는 첫 번째 성향임이 틀림없다."

"조와 제인 두 사람을 생각해 보라. 그들의 행위는 똑같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에는 차이가 있다. 조는 다른 사람의 성공에 즐거워하고 다른 사람의 재난에 슬퍼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제인은 다른 사람의 재난에 기뻐하고 그들의 성공을 시기하는 경향이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행위(그리고 옳은 것을 하려는 그들의 의지)가 비슷하다는 점에서 행위 중심 윤리학자는 그들을 똑같이 도덕적이라고 간주한다. 하지만 덕 윤리학자는 그렇지 않다. 조는 필수적인 도덕적 태도를 지녔지만, 제인은 없다. 제인은 그러한 태도를 바꾸어야 할 도덕적 의무를 진다.

토머스 힐은, 항상 도덕적으로 옳거나 허용할 수 있는 행위를 하지만 그 행동이 열등한 자존심에서 비롯된 한 부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는 자신을 존중하는 게 아니라 자기 비하의 태도를 지닌 채 그녀의 남편과 아이들을 존중한다. 자기-존중은 명확히 구별되는 행동 유형으로 분석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이성적 존재로서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존재라고 가정한다면) 우리가 가르칠 의무가 있는 하나의 덕이라고 믿는 것이 그럴듯해 보인다. 만약 이것이 옳다면, 자신을 존중할 의무는 여전히 두 번째 논제에 반대되는 또 다른 예이다.

슬픔, 감사, 존중 그리고 감수성과 같은 반응적 태도나 감정들이 있다.

많은 상황에서 그것들은 행위의 토대가 될 수 있는가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 적절한 듯하다. 표준적 행위-중심 견해는 도덕성의 이러한 특성을 무시한다. 그것은 도덕성을 행위로 환원한다.

다음은 표준적 행위 중심 입장의 마지막 세 번째 논제이다.

3. 도구적 가치 논제. 도덕적 덕은 본디 가치가 아니라 도구적이고 파생적인 가치를 가진다. 덕이 중요한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옳은 행위를 하도록 동기부여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다원주의 윤리학자들은 덕에 대한 이러한 도구적 가치론을 거부한다. 덕은 본디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단순히 파생적인 것이 아나라 선한 삶을 구성하는 것의 일부이다. 선은 단지 다른 사람을 위한 선일 뿐만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도 똑같이 선인 것이다. 덕(알맞은 정도로 올바르게 표현되지 않은 성향과 태도들을 가지는 것)은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 필요 불가결한 일부이다. 조는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 대해 슬퍼하고 성공적인 사람들에 대해서 즐거워하기 때문에 더 좋은 사람이다.

그는 적절한 태도를 지쳤지만, 제인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행복의 질에 영향을 준다. 옳은 것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심지어 옳다는 이유로 하지 않은 것을 행하는 것조차도 충분하지 않다. 옳은 것을 도덕적 태도를 지니고 행하는 것 그리고 행위가 불가능할 때조차도 옳은 태도와 성향을 가지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표준적 행위 중심 견해와 다원주의적 견해의 차이는 이렇다. 양자 모두 인간의 번영의 증진이 도덕의 본질적 목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행위 윤리학자는 도덕이 단지 이러한 상태를 만들어 내는 행위의 종류하고만 관계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다원주의 윤리학자는 덕이 인간적 번영이라는 것을 구성하며,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만들어 내고자 노력해야 하는 사태를 부분적으로 정의한다고 믿는다. 덕 윤리학자에게, 덕이 없는(덕에 무관심하거나 악덕이 있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

덕 중심 윤리학은 표준적 행위 중심 윤리학에 의미심장한 도전을 제기한다. 표준적 행위 중심 윤리학자가 이 장에서 제시된 대로 덕의 다원주의적 논제에 만족할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그만 다루고자 한다. 바로 이 문제가 정확히 오늘날 논쟁의 와중에 있다. 상응 혹은 다원주의적 논제가 올바른 논제인지의 여부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성품 없는 원리는 무기력하다는 것 그리고 덕은 일반적으로 원리에 생명을 불어넣고, 도덕적 삶에 활력을 제공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적어도 덕 윤리학자들은 덕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데 성공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덕이 무시되어 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도덕적 관점에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도덕철학에서 합의를 이루고 있다. 반면에, 순수 덕 윤리학은 강한 행위 중심적 요소 없이는 홀로 설 수 없다. 행위의 원리는 의무론적 설명과 공리주의적 설명이 말해 온 바대로 전반적으로 중요하다. 문제는 이러한 설명들이 어떤 점에 서 그르냐가 아니라, 그것들이 완전한 도덕적 삶에 대한 적절한 설명인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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